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라하의 봄 (문단 편집) === 소련의 개입 === ||<-3> '''{{{+1 다뉴브 작전[br]Operace Dunaj[br]операция «Дунай»}}}''' || || '''시기''' ||<-2>[[1968년]] [[8월 20일]]~[[8월 21일]] || || '''장소''' ||<-2>[[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전역 || || '''교전국''' ||[[파일:소련 국기(1955-1980).svg|width=25]] '''[[소련]]'''[br][[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width=25]] '''[[폴란드 인민 공화국]]'''[br][[파일: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국기(1971–1990).svg|width=25]]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br][[파일:헝가리 인민 공화국 국기(1957–1990).svg|width=25]] '''[[헝가리 인민 공화국]]''' [br][[파일:동독 국기.svg|width=25]] [[동독|독일민주공화국]](군사지원국) [br][[파일:쿠바 국기.svg|width=25]] [[쿠바]](외교지원국) [br][[파일:베트남 국기.svg|width=25]] [[북베트남]](외교지원국) [br][[파일:북한 국기.svg|width=25]] [[북한]](외교지원국) [br][[파일:몽골 인민 공화국 국기.svg|width=25]] [[몽골 인민 공화국]](외교지원국)||[[파일:체코 국기.svg|width=25]]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br][[파일: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svg|width=25]]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외교지원국) [br][[파일: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국기.svg|width=25]]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외교지원국) [br][[파일: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 국기.svg|width=25]]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외교지원국) [br][[파일:중국 국기.svg|width=25]] [[중화인민공화국]](외교지원국) || || '''지휘관''' ||[[파일:소련 국기(1955-1980).svg|width=25]]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br] [[파일:소련 국기(1955-1980).svg|width=25]] 니콜라이 포드고르니 소비에트 최고간부회의의 의장[br] [[파일:소련 국기(1955-1980).svg|width=25]] [[알렉세이 코시긴]] 수상[br] [[파일:소련 국기(1955-1980).svg|width=25]] 안드레이 그레치코 국방장관[br] [[파일:소련 국기(1955-1980).svg|width=25]] 이반 야쿠봅스키 [[바르샤바 조약 기구]] 통합군 참모총장 [br] [[파일:소련 국기(1955-1980).svg|width=25]] 콘스탄틴 프로발로프 남부군집단(헝가리 주둔 [[소련군]]) 사령관[br][[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width=25]]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폴란드 제1서기[br][[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width=25]] 마리안 스피할스키 폴란드 국가평의회 의장[br][[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width=25]]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폴란드 국방장관[br][[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width=25]] 볼레스와프 호하 폴란드 인민군 총참모장[br][[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width=25]] 플로리안 시비츠키 폴란드 지상군 2군 사령관[br][[파일: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국기(1971–1990).svg|width=25]] '''[[토도르 지프코프]]''' 불가리아 서기장[br][[파일: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국기(1971–1990).svg|width=25]] 도브리 주로프 불가리아 국방장관[br][[파일:헝가리 인민 공화국 국기(1957–1990).svg|width=25]] '''[[카다르 야노시]]''' 헝가리 제1서기 [br][[파일:헝가리 인민 공화국 국기(1957–1990).svg|width=25]] 치네게 러요시 헝가리 국방장관 [br][[파일:동독 국기.svg|width=25]] [[발터 울브리히트]]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파일:체코 국기.svg|width=25]] '''[[알렉산데르 둡체크]]''' 체코슬로바키아 서기장[br][[파일:체코 국기.svg|width=25]] [[루드비크 스보보다]]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br][[파일:체코 국기.svg|width=25]] 올드리히 체르니크 체코슬로바키아 수상[br][[파일:체코 국기.svg|width=25]] 마르틴 주르 체코슬로바키아 국방장관 || ||<|3> '''전력''' ||[[파일:바르샤바 조약기구 로고.svg|width=25]] [[바르샤바 조약군]] 25만 명(20개 사단)[br]전차 2000대[br]항공기 800대 ||<^|3>[[파일:체코 국기.svg|width=25]] 체코슬로바키아 인민군 23만 명(18개 사단)(동원 금지)[br]전차 2000대(동원 금지)[br]프라하 시민들 || [[파일:Soviet_Invasion_Prague_Spring (16).jpg]] 윈체즐라즈 광장에서 소련군 [[T-55]] 전차에 올라타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는 프라하 시민들 > '''"너희 아버지들은 [[독소전쟁|해방군으로 이 나라에 왔는데]], [[소련군|너희]]는 억압자로 이 나라에 왔구나, 창피한 줄이나 알아라!"''' >---- > 프라하 윈체즐라즈 광장(현 바츨라프 광장)에 모인 시민들 [[파일:external/edocs.uis.edu/Prague_Spring_1968_Dissident_Cartoon.jpg|width=100%]] 당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만평. 소련군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만 해도 분명한 체코슬로바키아의 '해방자'였다, [[전간기]] 당시 소련군은 체코슬로바키아의 함락을 막기 위해서 군사연합을 맺었고 전쟁 중에는 반 나치 봉기를 일으키던 체코인과 현지 유대인들이 소련군과 협력해 현지의 독일인과 나치 부역자들을 추방하거나 몰살하면서 나치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뿌리뽑을 수 있었다. 그러나 냉전이 도래하자 공산 블록의 붕괴를 저지하고 싶어하는 소련과 민주화와 자유를 갈망하는 체코인의 목표가 서로 충돌하게 되면서 소련군은 [[독일 국방군|독일군]]에 이은 또 다른 압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파일:external/i781.photobucket.com/45947_709876715689070_38796972_n_zpsarakjnwg.jpg|width=100%]] 진압을 위해 투입된 [[T-10M]] 전차. 이때가 T-10의 유일한 실전 기록이다. 프라하 민중들한테 낙서를 당한 것 빼고는 별 일 없이 귀환했다고 한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eb08a20365234d904744439a818fdb56.jpg|width=100%]] 프라하 시내에서 시민들이 설치한 바리케이드 차량을 밀치는 소련 공수군 [[ASU-85]] 자주포 [[파일:external/photos.state.gov/prague3.jpg|width=200%]] 프라하 시내를 질주하는 소련 공수군 [[ASU-57]] 자주포 [[파일:soviet_T-55_during_Spring_of_Prague.jpg|width=100%]] --기관총이 제멋대로다.[* 오합지졸이라는 것이 아니고, [[DShK|기관총]]을 사용하고 나서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관총이 저렇게 돌아가 있는 것이다.]-- 프라하 시내로 진입한 소련군 [[T-55]] 전차부대. [[러시아 육군|러시아 연방군]]이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Z(군사 표식)|로마자 "Z"]]를 군사식별표시로 사용했다면 저 당시 소련군은 하얀색 십자 표식을 군사식별표시로 사용했다. 다만 하얀색 십자가 표식이 체코 침공 과정에서만 사용된 것은 아니고 [[베를린 공방전]]에서도 아군 항공기에 의한 [[아군 오사|오폭]]을 막고 [[피아식별]]의 용이성을 위해 시가전에 투입된 [[IS-2#s-9.1.1.2|IS-2 전차]]와 [[T-34-85#s-7.1.1.8|T-34/85 전차]]에도 흰색 십자가 표식을 칠한 적이 있다. 프라하도 베를린과 유사한 시가지이기 때문에 [[피아식별]]의 용이성을 위해 칠한 것으로 추정. [[파일:02-tanks.jpg|width=200%]] 마찬가지로 프라하 시내로 진입한 소련군 [[T-62]] 전차대.[* 소련은 [[나토군]]의 개입을 우려해 당대 최신 병기들도 적극적으로 투입했고 T-62도 그 중 하나였다. 그 외에도 [[BMP-1]][[https://www.reddit.com/r/HistoryPorn/comments/1kvomh/a_child_watches_as_warsaw_pact_tanks_invade/|도 실전투입했다.]] 그러나 나토군의 개입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기적으로 72년 이후 생산분이 아니기 때문에 대공기관총이 존재하지 않는다.] [[파일:캡처_2022_06_02_00_26_47_574.png|width=2000]] 체코슬로바키아 영내의 Milovice-Mladá 비행장에 배치된 소련 공군 159근위전투기연대 소속 [[MiG-21]]S 전투기[* [[폴란드 인민 공화국]] 주둔 [[http://www.easternorbat.com/html/soviet_4th_tactical_air_army_6.html|제4전술항공군]]이 나토군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 영내로 재배치되었다.] [[파일:캡처_2022_06_02_00_32_54_772.png|width=2000]] 체코슬로바키아 영내의 흐라데크 호랄로베 비행장에 배치된 소련 공군 42근위전폭기연대 소속 [[MiG-17]] 전투기 > ''' "나는 온화하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주 세게 때릴 수 있는데 그런 다음에는 사흘을 토할 것 같아요." ''' >----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이 한 말. 그는 무력침공에 부담을 느꼈고 최대한 이를 피하고자 했지만 소련의 핵심 국익을 위해서 결국 침공을 결정했다. [[소련]]은 이 상황을 그냥 방치하지 않았다. 그대로 내버려둘 경우 체코슬로바키아 하나의 민주화로 끝날 게 아니라 [[공산권]] 전체로 파급될 것이 분명했는데 결국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그 예상이 맞았음이 증명됐다. 게다가 서방 국가들이 개입할 가능성도 높았기 때문이다. 다만 [[1956년 헝가리 혁명]] 진압처럼 전쟁 상황으로 가면 [[동유럽]]의 여론도 나빠지는 건 물론 서방에서 가만 있지 않을 게 분명했으므로 제압은 하되 인명피해는 최소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된다. 그나마 희생이 최소화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1950년대와 달리 분위기가 달라진 1960년대 말에는 무력진압은 소련이라도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는 방증이다. 어쨌거나 브레즈네프는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에게 서신을 보내 미국 정부가 [[얄타 회담|얄타]]와 [[포츠담 회담|포츠담]]에서의 조약을 준수할 의도가 있는지의 여부를 물었다. 미국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소련 측에 의한 반자유주의적 압력이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 [[베트남 전쟁]]에 신경 쓰느라 프라하의 봄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고 전쟁 피해를 복구한 뒤 전성기를 누리던 서유럽 국가들도 개입에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묵인하는 길을 선택했다. 당연히 [[공화당(미국)|공화당]]은 존슨 행정부의 이런 대응을 까댔지만 정권이 공화당으로 넘어간 뒤에도 욕은 엄청 했어도 추가 조치는 없었다. 한편 소련 지도부는 미국의 묵인에도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미군과 나토군의 개입에 대비해 [[러시아 연방군/편제#s-4.5|소련 전략로켓군]]과 [[소련 해군]]은 최고 경계태세에 돌입했다. 미소의 유럽 분점체제의 유지의사가 미국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한 소련은 4개월 만인 1968년 8월 20일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앞세우고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4개국의 '''약 20만 대군'''을 이끌고 체코슬로바키아에 개입했다.[* 당시 [[국가인민군|동독군]]도 동원하려 했지만 [[나치 독일]]과 같은 이미지가 비춰지는 것을 우려해서 동독군은 투입되지 않았다.] 이게 얼마나 큰 규모인가 하면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인구가 1,000만 명 정도였다. 체코슬로바키아 인구의 약 2%에 달하는 대군을 투입한 이유는 [[헝가리 인민 공화국|헝가리]]나 [[동독]]의 봉기로 인해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하면서 서방의 비난을 받은 것으로 인해 또 다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봉기가 장기화되면 미국이 당장은 가만히 있는다고 해도 결국 국내외 여론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이번에는 정말 개입할 수도 있다고 판단해 체코인들의 저항의지를 사전에 꺾어서 충돌 확률 자체를 줄여 인명피해를 최대한 내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도부에게는 정치적 보복을 과하게 하지 않는 조건을 걸고 항복을 권유했다. 물론 저항이 확인되거나 [[나토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진입시 즉각적으로 상부의 허가 없이 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침공군의 주축들이었던 [[폴란드 인민 공화국|폴란드]]와 동독도 옛날에 반소 시위를 겪었던 적이 있다. 게다가 당시 폴란드의 국가원수였던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는 아예 반소 시위 강제진압의 여파로 스탈린주의파의 위세가 위축되자 폴란드 공산당 내에서 민족주의적 성향을 발판으로 인기를 얻었고 그 덕택에 주도권을 잡아 집권한 사람이다! 12년 만에 다른 행보를 보이게 된 것. 그리고 2년 뒤에 생필품 가격을 인상하자 인민들의 반발로 인해 에드바르트 기에레크에게 정권을 내주었다. 8월 21일 새벽 2시, [[프라하 바츨라프 하벨 국제공항|프라하 공항]]을 향해 소련군 [[An-24]] 수송기가 접근했다. An-24 수송기는 공항 관제탑측에 기기 이상으로 비상착륙한다고 밝혔고 공항 측도 순순히 착륙을 허가했다. 그러나 이는 기만이었고 소련 공수군 7근위공수사단 선두 병력들이 탑승하고 있었다. 소련군 공수부대원들은 무혈로 프라하 공항의 관제탑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를 발판삼아 [[An-12]] 수송기들이 대거 착륙해 소련 공수군 병력들과 장갑차들을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동독 주둔 소련군 소속 제20근위군 소속 전차사단들과 폴란드군, 헝가리군, 불가리아군 소속 병력들이 [[프라하]]와 [[브르노]]로 진입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국제사회에 바르샤바 조약기구군의 부당한 침입을 호소하였으나 그 어떤 나라도 이를 듣지 않았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 때문에 동구권에 큰 신경을 쓰지 못했고, [[영국]], [[프랑스]], [[서독]] 등 서유럽 국가들도 [[68운동]]의 여파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상황을 신경쓸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경우 조약군의 침공 시 나토군이 즉각 개입하려 했다.[[https://english.radio.cz/nato-braced-european-war-soviets-after-1968-invasion-8045620|#]] 오스트리아는 비록 중립국이지만 실질적으론 서독과 이탈리아를 보호하는 완충지대였기 때문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군과 국민들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당부했고 소련군도 시민들의 단순한 항의 시위 정도는 무력으로 진압하지는 않았다. 정치지도자들은 정치 보복을 지나치게 하지 않는 조건으로 순순히 투항했으며 결국 둡체크를 비롯한 개혁파 지도자들은 소련으로 연행되었다. 그래도 1956년 [[헝가리 혁명]] 때와 달리 처형된 사람은 없고 대부분 징역 혹은 추방으로 끝났으며 항의시위를 하던 시민들도 건드리지 않았다. 브레즈네프가 둡체크를 밀어서 체코슬로바키아 수반으로 앉힌 원죄도 있고 헝가리에서 [[너지 임레]]를 처형했다가 지속적인 반소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을 참고하여 체코에 대해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또 둡체크는 소련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었기에 둡체크를 처형하면 체코 내부에 있는 소련파의 세력이 급격히 약해질 가능성이 높은 점도 고려했다고 한다. 그래서 둡체크는 소련에 끌려간 지 몇 년 만에 석방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또한 [[굴라크]]로 가지 않고 [[구치소]]에서 강제노동 없이 감금만 됐다고 한다.[* 둡체크는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온 뒤 슬로바키아 산림청에서 잠시 근무했고, 벨벳 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88년]]에는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교]]를 방문하기도 했다. 하여튼 생각보다 별 탈 없이 조용하게 지낸 덕에 [[동유럽 혁명|벨벳 혁명]] 때 빠르게 복권되고 군중들 앞에서 다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다만 민주화가 되고 얼마 가지 않은 [[1992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최종적으로는 진압과정에서 72명의 민간인 사망자 및 226명의 중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이로써 프라하의 봄은 끝나고 1969년 4월 당 제1서기가 된 [[구스타우 후사크]]에 의해 사태가 수습되었다. 투입되었던 폴란드군[* 30,000명의 병력과 2,000여 대의 차량, 750대의 전차, 592대의 장갑차]과 헝가리군은 1968년 10월 31일에 철군했지만 소련군은 계속 주둔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21px-Prag_Kreuz_f%C3%BCr_Jan_Palach.jpg|width=100%]]||[[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anPalach.jpg|width=100%]]|| || 팔라흐와 자이츠가 분신했던 장소에 설치된 추모 십자가 || 얀 팔라흐의 사진 || 당시 소련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철저하게 장악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둡체크로 대표되는 개혁파 지도자들이 유혈사태를 우려해 소련군에 맞서지 말 것을 적극적으로 당부하면서 헝가리 혁명과 같은 무장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분노한 시민들은 조약기구 군을 상대로 시위를 벌였고 많은 젊은이들이 소련 침공에 반대했으며 그 중에는 분신을 한 청년들도 소수나마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얀 팔라흐(Jan Palach, 1948 ~ 1969)로 1969년 1월 16일에 분신자살했으며 얀 자이츠(Jan Zajíc, 1950 ~ 1969)는 그의 뒤를 이어 2월 25일에 분신자살을 했다. 이들의 분신은 체코슬로바키아 지도부를 두렵게 했고 반정부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기도 했다. 프라하의 중심가인 바츨라프 대로 광장에 그들을 기리는 동판과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진압군 파견국 중 하나인 [[폴란드]]에서도 폴란드 국내군(Armia Krajowa) 출신인 리샤르트 시비에츠(Ryszard Siwiec, 1909 ~ 1968)가 59세의 나이로 [[바르샤바]]에서 분신자살했다. [[https://focus.ua/archivist/408714-operaciya-dunaj|그리고 이후에도 25건 이상의 분신이 발생했고 6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68운동]]의 영향이 전 세계로 퍼진 상황인 데다 사회주의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 변혁운동이 되어 반스탈린, 반권위주의 운동이어서 기존 좌파 정치세력이 소련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길 꺼린 것과는 달리 68운동 당시의 [[신좌파]]들은 동유럽 내 민주화 세력에게 호감과 연대 의사를 표현했다. 신좌파들은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와 그 사회 체제에 영합하고 관료화된 공산당 등의 체제 내 좌파정당에 의해 소외감을 느낀 사람들을 중심으로 발생했다. 그 뒤 [[구스타우 후사크]]가 정권을 잡아 소위 '''정상화(''normalizace'')'''정책을 실시하였다. 말그대로 프라하의 봄 이전 시대의 정책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이다. 이 당시 개혁파 당원들은 대거 좌천되거나 당에서 제명되었으며, 문화적으로도 검열이 강화되고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주기적인 단속과 탄압이 이루어졌다. 물론 3S정책과 비슷하게[* 3S정책은 문화적으로 유화정책을 펼친거라면 체코슬로바키아는 경제적으로 유화정책을 폈던것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3H라는 경제적인 유화정책도 단행하여,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값싼 임대주택을 제공하는 한편, 양육수당을 크게 올리면서, 경공업 발달에 매진하여 생필품 공급은 원할해지는 등 1980년대 외채위기 이전까지는 경제적으로는 잠시나마 호경기가 찾아왔기는 했다. 그래서 정치적 희망이 좌절된 체코슬로바이카인들은 한동안 정치적 무관심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정치에 대환 관심이 크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1970년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베이비붐이 분 이유가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이 정치적인 희망이 좌절되자 섹스에 관심을 두어서라는 농담반 진담반의 얘기도 나돌 정도였다.[* 그래서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는 1969~1987년 사이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들을 후사크의 아이들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프라하의 봄'이란 체코 필하모니 결성 50주년을 기념하여 1946년부터 5월마다 열린 프라하의 음악제의 이름이다. 당시 한 외신기자가 '프라하의 봄은 과연 언제 올 것인가?'라고 타전한 이후 이 '봄'이라는 단어는 [[부다페스트]]의 봄, [[바르샤바]]의 봄, [[서울의 봄]], 그리고 최근의 [[아랍의 봄]] 등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자유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단어로 자리매김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